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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충전/Something

[전시] 31살 짧은 그의 삶을 마주하다 - 키스해링전


 "예술이 그들에게 문을 열 때 그들도 예술에 마음의 문을 연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단순하지만 따뜻한 그림.

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했었지만
그림은 낯이 익었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한가한 일요일 오후
그를 만나러 올림픽 공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전시회를 찾은 날, 날이 유난히도 맑고 하늘색도 너무 이뻤습니다.
 정말이지 파아란 하늘에 노란, 빨간 그의 작품들은 유난히도 밝고 경쾌해보였습니다.



일요일 오후였지만 사람들이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전시가 진행된지 제법 시간이 흘러서 였던것 같았습니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에
모처럼 찾은 미술관에서
처음 만난 팝아티스트 키스해링.
솔직히 말하면 그의 이름은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그 오후
처음 나와 만나게된
20년전에 정지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속 원색처럼 열정적이고도 강렬한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그토록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작품이기에
그의 그림들이 더욱
강렬하게 보였습니다.










그 의 어린시절


 그는 그림으로 친숙한 작가입니다.
 키스해링이란 이름보다 그림으로 먼저 친숙해지게 되는것 같습니다. 

 굵은 선, 따뜻한 원색, 경쾌한 그림들이 어렵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미술에 대해서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은 왠지 쉽고 또 동심을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전시회에서는 그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함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로, 그리고 작품으로 그를 만나는 시간... 잔잔한 여운이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을 접하게 되었던 키스해링은

 월트디즈니 등 다양한 대중매체와 접목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이러한 그의 취향은 작품속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미키마우스와 접목시켜서 나타내기도 했고
 또 그 스스로도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했습니다.








뉴욕의 모든 것이 그의 무대가 되다


 1980년대 초 낙서로 가득한 뉴욕의 지하철 검은 광고판을 하얀 분필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뉴욕의 더럽고 후미진 벽이라면 언제든 그의 캔버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그림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길 원했고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그가 유명해진 이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게 됩니다.


 그는 파리, 런던, 니스, 베를린, 크노케, 밀라노, 함부르크, 마라케시, 마드리드, 몬테카를로, 도쿄 등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한 벽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뉴욕 타임스스퀘어가든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거리, 피사의 성당 외벽, 베를린 장벽, 도쿄의 간판 등에 남겨진 그의 작품들은 도시의 랜드마크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하네요.

 그는 또 세계 곳곳에 그의 작품을 가능한 한 많이 남기며, 많은이와 소통하기를 원했고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행동하는 미술가 였습니다. 예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그역시 대중 예술의 한 영역임을 이야기하면서 일기를 통해 그에 대한 고뇌를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일기(키스해링저널)에 보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에 대한 고뇌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뭔가를 팔아야 한다는 게 때로는 지긋지긋하다.
 창작만 하고, 그 결과물을 차곡차곡 모아 쌓아두고만 싶은 심정이다.
 만들기만 하고 싶을 뿐 팔고 싶지는 않다.
 내 작품이 얼마여야 하고 몇 퍼센트가 내 몫이며
 어떤 작품을 보관하고
 또 얼마나 많이 보관해둬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보내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은 정말 비생산적이기도 하지만 반(反)예술적이기도 하다.
 내게는 작업할 때가 유일하게 행복한 때다.”








그와 그의 작품속 긍정의 힘

 그의 그림은 단순해서 직관적입니다.
 ‘개’가 짖고,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탑을 쌓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기도 하며,
 하트를 들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
 사람 속으로 또 다른 인간이 들어가기도 하고, 
 빨간 하트가 걸어다니기도 합니다.

 직관적이고 단순한 그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미술은 잘 몰라도
 마음이 발랄해지고 한결 경쾌해짐을 느낀다.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긍정의 힘이
 그의 그림 안에는 있는거 같았습니다.

 다큐멘터리속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그 역시도 그림을 그리는 걸 즐거워하고
 주변에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걸 행복해하는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을 녹화하기도 했고
 아이들과 그림을 그려 자유의 여신상을 그려내기도 했었으며
 1980년대 운집한 군중 속에서 비트박스를 하면서 대규모 벽화작업을 그리기도 하였고 합니다.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런 그가 1990년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은 나로써는 전시회를 들어가기까진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습니다.
 올해로 그가 사망한지 20주기.....
 20년전의 그의 작품이 지금도 세련미있게,
 여전히 파워풀한 대중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은 전세계가 공감하고 전 시대가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 같았습니다.







행동 하는, 끝까지 그랬던 키스해링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는
 다양성의 가치, 그리고 함께하는 가치를 먼저 깨닫고 실천했던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확실히 남다른 감각이 있었고
 또 남다르게 인간적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래서
 그가 조금 더 살았었더라면 어땠을까,
 얼마나 더 많은일을 했을까,
 얼만큼 세상이 더 따뜻하고 경쾌해졌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했습니다.






에이즈, 그리고 키스해링


 1988년 에이즈 양성 반응 판정을 받은 해링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에이즈와 에이즈 공포,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 정치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1982년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자비로 제작한 반핵 포스터를 배포하고,
 1985년에는 남아프리카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해 2만 장의 포스터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작업한 〈남아프리카에 자유를〉연작 석판화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침묵=죽음, 키스해링 작품)

 또한  에이즈 캠페인에도  적극적이어서〈침묵=죽음〉이라는 작품을 통해 에이즈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 키스해링재단을 설립해 사후에까지도 에이즈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후원에 참여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Pisa, Italia.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성당 벽화)


“예술은 삶이나 죽음보다 훨씬 중요하다”라고 믿었던 키스 해링이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하는 사실은 아직도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이탈리아 피사 시의 성 안토니오 성당 외벽에 남긴 대형 벽화라고 합니다.








이제 남겨진 작품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키스해링.

그의 작품을 만나는 시간동안 유쾌했고
그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나마 만날 수 있었던
유쾌한 어느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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